[소설]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9.0점)

from [생각]/책 2008/04/14 11:40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 가쿠타 미쓰요 / 9.0점(10점만점) / 책의 존재 이유를 찾아서...


"당신에게 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목만으로 이토록 책이 읽고 싶었던 적은 몇 번 없었다.
작가에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책을 반절이나 읽고나서야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가쿠타 미쓰요' 어라? ..저번에 읽은 '사랑이 뭘까'의 작가네.
같은 작가일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에 약간 놀랐다.
사랑이 뭘까도 괜찮긴 했지만 난 가쿠타 미쓰요의 단편이 더더욱 맘에 든다.
바로 이 책.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단편 모음집이다.

내게 책이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릴때부터 그냥 읽기 시작했고 가끔은 정말 읽기 싫은 책도 억지로 읽었다.
어릴때는 대체로 초능력개발(말도 안되는 내용)이나 세계명작, 위인전등을 읽었는데
투시나 공중부양, 순간이동 같은 초능력은 전혀 발휘되지 않았고
에디슨전기를 읽고 에디슨처럼 아무리 달걀을 껴안고 있어도 달걀은 부화되지 않았다.
중학생때쯤엔 공부법에 대한 책과 가끔 고전을 읽고 일본소설을 읽었다.
더 나이를 먹고는 실용서와 정말 가끔 과학책을 빌려봤고
지금은 소설과 에세이를 주로 읽는다.
그냥 읽고 또 읽고 계속해서 읽을 뿐이다.

책 한 권 한 권에 얽혀있는 사연을 담은 이 소설책은
내 머릿속에 있던 책과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여러모로 충족시켜주었다.

헌책방에 팔아넘긴 책을 여행지에서 몇 번이나 마주치거나
여행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에서 편지를 발견하거나
늙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책을 슬쩍하는 일.
낡은 책에서 느껴지는 다른이의 기억.
애인에게 책을 선물한 어린 연인.
책장과 책을 공유하며 사랑하던 동거 남녀.
소문으로 떠도는 전설의 책을 찾아 헌책방 순례.
죽을날이 다가온 할머니가 갖고 싶어하는 책을 찾는 손녀.

책 한 권으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만나고 헤어지고
나이를 먹고, 같은 책을 몇 년 뒤에 읽었을때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
책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오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살며시꺼내 종이에 옮겨적어준
이 고마운 작가를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오늘도 나는 펼치는 것만으로 날 세상 어디든 데려가주는 책을 읽는다.
완벽히 내게 책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책을 읽으면 즐겁고 행복하다는 마음만으로 존재의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헌책방은 세계 어디나 같은 냄새가 난다. 그것이 거리에 펼쳐진 좌판이라고 해도.

그렇게 나는 어슴푸레한 술집 구석에서 깨달았다. 변한 것은 책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소중하게 마음에 품고 있던 추억들이 왜 단어로 쓰이는 순간, 사는 냄새만 가득한 좀스러운 것이 될까.
기가 막힌다. 특별해야 할 편지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여자가 어디에나 존재하는 연인에게
보낸 것 같은, 진부한 단어의 나열이 되고 만다.

파랑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나오지. 하나켄의 말에, 아니야, 파랑이 아니라 회색에 가까운 흰색 옷이야.
내가 정정했다. 아니야, 분명 파란색이야. ... 책을 꺼내며 그럼 내기하자고 말했다. ...
그 단편 소설을 끝까지 읽었다. 그러나 그 소설에는 여자 아이의 옷 색깔 같은 건 쓰여 있지 않았다.

불행이랄 거 하나도 없었어. 나는 웃는 일도 우는 일도 없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담담한 매일이
되풀이되는 게 불행이라고 생각해.

그저 펼치는 것만으로 어디든 데려가 주는 건 책밖에 없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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